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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업무는 없고, Office에서 딴 짓 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해서, 아예 대놓고 Office를 나와버렸다. 자리에 없는 게 '회의를 들어갔거나 아니면 TEST하러 갔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물론 아예 회사를 나와 버린 건 아니고, 사내 도서실을 갔다.
가서 뭘 읽을까 하다가 최근에 본 영화 'Da Vinci Code'를 소설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1권을 꺼내서 1권을 오후 내내 읽었다. 확실히 영화보다는 소설이 좋더라. 물론, 읽는 게 이젠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영화에서는 얘기 안 해 줬던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 특히나 기호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와서 나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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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을 시작한 지 이제 해수로 5년째다. 월드컵 4강 신화의 광풍이 불던 그 때, 실험실에서 했던 Hera & Zeus... 그리고 한참의 Term을 뒀다가 했던 Hare & Tortoise와 Clue가 날 이렇게 변화시킬지 누가 알았겠나? 하지만, 중간 중간 관심이 조금씩 준 건 사실이다. 물론 그 때도 보드게임으로 알게 된 사람들과 놀았지만... 이젠 어찌 보면 회사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보드 게임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 내 인간 관계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난 그렇게 잔 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 사귀는 걸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드 게임만 하게 되면 사람이 좀 Over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사람이 그리웠던걸까? 한 때 보드 게임은 안하고 그 사람들하고 만날 때, 난 보드 게임이 사람을 만나서 놀고 또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매게채라고 생각했었지.... 내가 보드 게임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술을 즐겨하지만 술자리를 좋아하는 거지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닌 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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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대부분이 수입 게임이다 보니 어학이 크나큰 장애 요소가 된다. 다행히 영어면 그냥 어케 읽고 할 수 있었고, 처음 보드게임을 즐겼던 아해들은 전부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어서, 내가 아니더래도 누군가가 규칙서만 어케 해결하면 카드 텍스트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로는 그런 환경이 안 되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어를 한글화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그렇다 보니 그런 게임들은 잘 안 하게 되고, 또 못 하게 되더라. 근데, 어차피 인원수를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굳이 찾아가며, 또는 누군가가 맡겨서 원문 규칙서를 읽곤 하는데... 이게 의외로 재밌다. 규칙서를 읽고 게임의 대강의 느낌을 아는 것도 나름 게임을 못하는 입장에서 즐겁지만, 이건 쇼핑몰이나 제작사의 게임 소개만 읽어도 그냥 감은 잡을 수 있으니, 그닥 큰 이유가 안 된다.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게임의 배경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다. Boardgamegeek에서 내가 Rating을 한 게임들을 한 번 훑어 봤다. 내가 준 평균은 4.5 정도 된다. 비교적 짠 편이다. 근데 그런 내가 7점 이상을 준 게임들, 아니 8점 이상 준 게임들은 50개가 채 안 되는 데 Lord of the Rings 관련이거나 GIPF Series가 아닌 것들은 다 공통점이 있더라. 대부분이 중세 또는 어느 특정 시대의 역사를 재현하거나 또는 그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게임이라는 것. 내가 보드 게임을 하게 되면서, 물론 보드 게임을 Collection으로 모으게 되긴 했지만, 보드게임 때문에 산 게 있다면 그건 바로 'Britannica 대사전'이다. 규칙서를, 특히나 역사 관련 또는 배경 게임들을 읽다가 모르는 사건이나 인물이 나오면 사전을 뒤져가면서 찾는 재미가 너무 쏠쏠한 것이다. 찾다 보면 (어느 영어 책 이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더 많은 사실들을 알아내는 게 너무 재밌고.. 이걸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더라. 아무래도 어린 시절 꿈꿨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꿈이 이렇게 나타나는 걸까? Da Vinci Code를 보면서 저 Fact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보드게임을 하면서, 정확히는 보드 게임 규칙서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다 보니, 게임을 하진 못하더라도 게임을 사서 또는 다른 Root로 얻어서 꼭 규칙서를 읽게 되는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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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임의 규칙서를 번역할 때의 일이었던 거 같다. 사전 지식이 없어서 의미 전달이 잘 안 될 꺼 같아서 관련 책자들을 다 뒤지고 인터넷 검색 창을 여러 개 띄워서 대조해가면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힘들게 했지만, 그 문장 하나 하나, 그리고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신경 써 가며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게임 속의 세계, 그리고 게임과 함께 하는 배경으로서의 세계에 대해서 좀 더 존중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난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너무나 많이 알았고, 그래서 그 번역하는 일이 너무 재밌었다.
(번역 하시는 분들이 너무 존경스럽다는 걸 여기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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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난 훌륭한 과학자는 못 될 거 같다. 아니 못 되었지. 사실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우고 그걸 검증하기에 난 너무 지혜롭지 못하다. 대신 훌륭한 학생은 될 수 있을 거 같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자체가 재밌고 좋으니까... 내가 가진 학위, 사실 많이 부담된다. 내가 그만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면, 늘 난 왜 이것 밖에 모를까 자괴감에 빠진다. 그냥 계급장 다 떼고 나 모르니까 아무거나 다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고는 평생 배우면서 살고 싶다. 경제적 여건만 된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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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내가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보드 게임을 통해서 더 이상 (상식이든 사실이든 진실이든) 뭔가를 배울 수 없게 되지 않는 한 보드 게임에서 손을 못 놓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이런 게 좋아하는 거라면 난 부끄럽지만 '보드 게임을 좋아한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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