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슈타인이고 뭐고 해서 독일 사에 관심 갖다 보니 이런 걸 정리해보게 되네요.
다 아는 내용이라도 용서를...
30년 전쟁
이전 역사적 상황
독일 내 카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하여 루터가 성서적 진리에 입각하여 공격을 가하자 독일 내의 교황청 및 카톨릭 교구에 대한 불만이 일시적을 폭발하였다.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한 루터는 정통 신학자 요크와의 교리 논쟁에서 교황과 종교 회의의 권위마저 부인하자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고, 이에 새로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는 이른바 보름스 회의를 열어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작센 선제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루터의 의도는 아니었으나(실제로는 반대했다), 그 동안 쌓인 불만으로 농민 봉기와 각 영주들의 반란이 빈번해졌고 이들 반란 세력은 루터의 개신교를 그들의 종교적 논리적 배경으로 삼게 되었다. 이로써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간의 불화는 첨예화되었다.
결국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영토의 지배자가 해당 지역의 종교를 정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루터파는 인정을 받았으나 또 다른 개신교의 일파인 칼뱅파와 재세례파는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한편, 종교 개혁의 물결이 사그러들자, 트리엔트 종교회의를 계기로 카톨릭 교회의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예수회의 조직을 통해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등 반종교개혁이 카톨릭 진영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교리 해석을 놓고 개신교 진영에서는 루터파와 칼뱅파의 분쟁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서 지배자의 종교에 대한 귀족들의 저항이 드세졌다. 카톨릭 계열의 막시밀리안 1세가 도나우 지역을 점령하고 종교를 강요함에 따라 개신교 세력은 연합을 형성하고 이에 카톨릭 진영 역시 동맹을 만들어 양 진영은 일촉즉발의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전쟁의 성격
전쟁 발발 요인은 영토적인 문제, 왕권과 관련된 문제, 종교적인 문제 등 다양한 것들이 있다. 종교적 문제가 영향을 끼치긴 했냐고 난상토론이 벌어지긴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으며, 특히 각 개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전쟁 기간 동안 동맹 관계와 지역적인 평화 조약은 시시때때로 변했다. 전체적으로 봐서 전쟁은 합스부르그 왕가와 카톨릭을 지원하는 영주들의 지원을 받는 합스부르그 왕가로 대표되는 신성 로마 제국의 권력과 유일성에 대한, 개신교를 지원하는 독일 영주들과 외국 세력(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영국, 연합 공구-현재 네델란드-)들의 반목 또는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은 합스부르그 가의 지배를 받는 보헤미아 지역의 개신교 영주들이 카톨릭을 지지하는 페르디난드 왕(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2세가 됨)에 대한 저항이자 결국 반란이 된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구조적인 취약함과 독일 공국들이 동시에 같이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상황, 그리고 다른 유럽 열강의 야욕에 의해 전쟁은 급속하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보헤미아 기간
반란은 프라하에서 시작되었다; 소위 ‘프라하의 투척(1618년 5월)’이라고 불리는 보헤미아 의회에서 개신교 일원들에 의해 2명의 왕국 관료들이 창 밖으로 내던져진 사건이 프라하에서 일어났다. 장차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될 카톨릭 계열의 페르디난드 2세는 보헤미아 왕위에서 귀족들에 의해 폐위당하고는 보헤미아의 왕위는 팔츠 선제후인 프레드리히 5세에게 양위되었다. 반란은 다른 합스부르그 왕가의 지배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특히 트랜실베니아에서 베틀렌 휘하의 반란군이 대단했다. 바이에른 공국의 막시밀리안 1세는 틸리가 이끄는 카톨릭 진영의 군대와 보내서 황제군이 프라하 근처의 백산 전투(비제베르크 전투, 1620년 11월)에서 보헤미아 반란군을 물리치는 데 협조했다. 독일 내 가장 큰 개신교 공국이었던 작센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우유부단한 성격에 30년 전쟁에서 작센의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는 카톨릭 계열인 페르디난드를 지원했다. 추후 겨울왕이라고 불리웠던 프레드리히는 보헤미아를 잃고 말았다. 전쟁은 팔츠에서 계속 되었으며 보헤미아에선 가차없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팔츠 기간
만스펠트와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별명 미치광이 크리스티안)이 팔츠의 개신교 군대를 이끌었다. 프레드리히 5세는 그의 장인인 영국의 제임스 1세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받지 못했다. 팔츠는 결국 틸리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는 Wimpfen과 Höchst에서 승리를 거두었다(1622). 프레드리히의 영토는 황제에 의해 압류당하고, 팔츠 북부 지역과 선제후 자격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수여되었다. 황제 진영의 Stadtlohn에서의 승리(1623)는 사실상 전쟁의 첫 단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덴마크 기간
독일 내전에서 국제적인 분쟁 양상으로 전쟁은 국면 전환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북부 독일에서 합스부르그 왕가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는 종교적인 이유를 천명했지만 실제로는 독일 내 자신의 영지 확장을 꾀했다. 영국과 연합 공구-네델란드-는 합스부르그 왕가에 대항하는 세력을 돕기 위해 보조금을 지원했으며, 영국의 경우에는 수천의 군사를 보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로 진격했다. 황제측은 발렌슈타인의 용병군에 의지했고, 발렌슈타인은 효과적으로 군대를 소집, 지휘하여 만스펠드를 데사우에서 물리쳤다(1626). 곧 이어, 덴마크 왕-크리스티안 4세- 역시 루터암바렌베르게에서 틸리에게 완패를 당했다.
황제군은 독일 거의 전 지역을 휩쓸었다. 발렌슈타인은 유틀란드로 진격하여 덴마크 군을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스웨덴-덴마크 연합 함대에 슈트랄준드에서 물러나야만 하게 된다(1628). 1629년 덴마크는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신성 로마 제국과 뤼벡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이에 따라 덴마크는 전쟁에서 물러나고 북독일 대주교령에 항복하게 된다. 페르디난드 2세는 발표한 복원 칙령(1629)을 통해 아우구스부르크 회의 이후 얻어졌던 교회 세력의 안정을 강화하려 시도함과 동시에 1552년 이후 개신교 세력에게 부여되었던 영지를 모두 환속시킨다고 선언하였다; 이 조치는 독일 내 개신교 세력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고, 자연적으로 잠재적이었던 개신교 지역들의 카톨릭과 황제에 대한 단호한 적대감을 일깨워버렸다.
스웨덴 기간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가 드디어 참전하게 되었다. 그의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은 폴란드와의 전쟁의 소용돌이로 그를 이끌었으며, 페르디난드의 해상 진출에 대한 계획은 발트 해에서의 스웨덴의 우위를 위협할 것이라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종교적 신념-개신교- 또한 그를 참전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페르디난드 2세)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카톨릭 세력인 프랑스의 양해와,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의 협력을 얻게 된다. 스웨덴은 독일로 진군하게 된다. 반면, 페르디난드 2세는 선제후들의 압력-슈트랄준드에서의 덴마크 군 괴멸의 실패에 대한 추궁 및 복원 칙령으로 인한 반발에 따른-에 의해 발렌슈타인을 총사령관에서 해고(1630)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황제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자신의 용병 부대를 이끌고 황제군의 가장 강력한 적군이 되게 된다. 결국 틸리가 황제군의 수장이 된다. 틸리는 전략적 요충지인 마그데부르크를 점령-이 과정이 너무 참혹하여 ‘마그데부르크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틸리에게 부쳐지고 적에게 좋은 선전 문구를 제공하게 됨-에서 하였고 개신교 진영의 영주들이 스웨덴과 합류하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틸리와 스웨덴 왕 사이에서 고민하던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1세만이 스웨덴 왕의 더 나은 제의를 받고 구스타프 진영에 합류하게 된다.
이 연합군은 틸리를 브라이텐펠트에서 괴멸(1631)시키면서 북부 독일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구스타프는 개선장군으로써 계속 진격해 나갔고 틸리는 후퇴를 계속하다 레흐 강 전투(1631)에서 치명상을 입고 만다. 다급해진 황제는 여러 차례 애원과 변명으로 발렌슈타인을 달래, 다시 그를 총사령관으로 전장에 내보낸다. 그는 작센 군대를 물리쳤고, 루첸에서 스웨덴 군과 전투를 벌였다(1632년 11월). 이 전투에서 황제군은 패했으나 구스타프는 전사했고 반합스부르그 동맹군은 붕괴되었다. 발렌슈타인은 참패 이후 아무런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황제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자, 적과의 중재자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적과의 기나긴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황제는 물론 모든 세력으로부터 반목을 사게 되었다. 반면, 유능한 반황제군 장군인 작센바이마르 출신의 베른하르트는 레겐스부르크에 맹공을 퍼부었다(1633).
발렌슈타인은 1634년 황제측 첩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황제군은 즉시 갈라스의 휘하에 들어갔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베른하르트를 물리쳤다(1634년 2월). 독일은 경제적으로 완전 괴멸된 상태였고, 영지 역시 초토화되고 피로 물들었다. 따라서 독일 내에 국경을 쳐들어 온 외국 군대에 대한 반감이 강해졌다. 평화에 대한 열망이 결국 프라하 협정을 이끌어 냈다(1635). 이 협정은 과감하게 복원 칙령을 수정하였고, 그 결과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이 화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협정은 거의 대부분의 독일 영주들과 자유 도시에서 승인되었다. 연합군은 독일 내 스웨덴 군대에 대해 작전을 수행하였다.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으나, 리슐리외(프랑스 추기경)는 합스부르그 왕가가 세력을 유지하는 걸 원치 않았다.
프랑스-스웨덴 기간
프랑스는 1635년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스웨덴의 총리였던 옥셴세르나는 독일 내의 스웨덴 영지를 유지하기를 열망했기에 리슐리외를 지원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기간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이제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개입된 형태로 진행되었다. 북부 저지대-베네룩스 3국이 있는 지역-에서는 네델란드-연합 공구-와 프랑스가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고, 이태리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세력 다툼을 벌였으며,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프랑스가 스페인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으며, 북유럽에서는 덴마크와 스웨덴이 대립했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프랑스로 진격하여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는 임시적인 성과였다. 이 기간의 대부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와 스웨덴의 바네르 장군은 독일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1636년 바네르는 비트슈토크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베른하르트는 훌륭한 전투를 계속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브라이사흐 요새를 점령(1638)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베른하르트는 1639년 바네르는 1641년 사망했다. 반면, 페르디난드 2세의 황제 자리는 페르디난드 3세에게 양위(1637)되었다. 1642년 리슐리외마저 죽고, 그의 후임자인 마자랭 추기경은 기존의 프랑스 정책을 유지했다. 독일은 완전히 피폐해지고 말았다.
평화 협상은 1640년 이전부터 진행되었으나 복잡하게 얽혀 버린 외교 상황의 타개는 매우 느리고 일관성 없이 진행되었다. 반면, 황제는 프랑스의 튀렝과 콩데, 그리고 스웨덴의 토르스텐손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점차 세력을 잃게 된다. 토르스텐슨은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을 물리치고(1642), 북쪽으로 가서 덴마크 세력을 진압한 후 갈라스를 격파했고, 프라하 근방 Jankau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645). 반면, 콩데는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 보병 주력을 괴멸했다(1643); 1645년에는 콩데와 튀렌은 (몇 번의 큰 승리 이후) 뇌르트링겐 근방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는 대부분의 점령지에서 제거당했고 오스트리아 군은 비엔나 근교까지 물러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바이에른은 괴멸했다. 한참 동안 지연되고 있던 평화 조약-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는 순간까지 스웨덴의 브랑겔 원수와 프랑스의 튀렌은 성공적인 작전을 계속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후
전쟁 때문에 일어난 황폐화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이젠 독일 인구의 30%정도나 되는 엄청난 전사자가 있었다고 조심스럽게 추산되고 있다. 전쟁이 중유럽의 경제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건 명백하지만, 상업 측면에서 보이는 한층 심각한 악화는 다른 어떤 요인에서 야기된 악화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그리고 200년 가량 지속된 결과는 독일이 수많은 영토로 분할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붕괴가 있었던 1806년까지는 제국의 형태로 묶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주권국가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장기간의 약화는 이후 독일 군국주의의 내재된 요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30년 전쟁은 열강들의 역학적 관계 또한 재정립하게 만들었다. 스페인의 쇠퇴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30년 전쟁의 프랑스 기간 동안 스페인의 위치는 프랑스가 차지하게 되었고, 포르투갈은 독립선언을 하였다(포르투갈 왕의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필리페 2세가 소유권을 주장한 이후 줄곧 스페인 지배를 받았다). 브라간자 집안이 포르투갈의 왕가가 되었으며 주앙 4세를 배출하였다. 프랑스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 국가가 되었다.
30년 전쟁의 마지막 기간인 1643~1645년 기간에는 스웨덴은 토르스텐슨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덴마크와의 분쟁에 얽혀 있었다. 이 전쟁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음과 동시에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의 유럽대전의 결과에 따라 전쟁 이후 스웨덴 역시 유럽 열강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에 따른 영토 분할은 소위 현재 주권 국가의 기본 방침을 확고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쟁에 포함된 수많은 국가(그리고 이후 새로 설립된 국가들)들의 지정학적인 경계선을 확고히 함은 물론, 이웃 열강의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입장에 따른 입김에 의해 한 국가의 국민들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의 자체적인 법이나 정부의 취향에 따라 제일 먼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사상이 우선적으로 결정 지어지는 것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정치적인 충성심과 종교적 믿음의 공존이 당연시 여겨지던 이전 사회와는 매우 대비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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